천둥은 번개를 불러오고 번쩍이며 사방을 비춰주던 번개는 하나 두렵지도 않았다. 오히려 푸르스름한 그 빚에 모습을 드러낸 연주와 나는 오묘한 충동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
펼쳐 들었던 우산도 볼품없이 바람에 접혀 버리고 우리는 처음 만나던 그 날처럼 비에 몸을 내 맡겨 걸었다. 아래로 늘 흐르던 개울엔 비로소 개울다운 모습을 드러내 물 흐르는 소리가 콸콸 들려와 전혀 말이 없던 연주는 욕설과 고함을 동시에 질러댔다. 우리는 거침없이 소리쳤다.
집 앞 가까이 다가오자 어둠 속에서 우뚝 선 물체 하나가 보였다. 이미 겁을 내다 버린 강직한 우리는 그 물체가 무섭지도 안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궁금할 뿐이었다.
우리 집에 누구야...
연주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너네들 비가 이렇게 내리 퍼붓는데 뭐 하는 거니?
아..해님 언니다. 우리 지금 돌았는데 햇님 언니도 우리랑 같이 돌아버려요. 번개가 히번쩍하게 빛나는 이 밤에 천둥이 꽈르릉하고 우리와 함께 놀아주는 이 밤이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구요. 이제부터 우리는 옷을 다 벗어 버릴꺼에요. 그리고 산에.. 산으로 갈꺼에요. 햇님 언니 오늘도 술 마셨나요? 그럼 그동안 마셨던 술 찌꺼기들을 다 씻어 내세요. 오늘 밤에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고 연주는 옷을 벗었다.
젖은 몸에 착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고 작은 가슴을 가려주던 가리개를 벗고, 주름이 흔적 없이 사라진 회색 치마를 벗었다. 나는 갑자기 울렁거려지는 저 바닥의 충동이 밀물처럼 밀려왔고 연주가 남은 옷을 벗는 동작을 보며 천천히 벗었다. 포르테보다 더 거센 그악함이 맨발이 된 발아래로 치밀어 솟구쳤다.
그래... 오늘 밤 다시 올 수 없는 새날로 이름 정하고 우리 미쳐볼까? 해님 언니도 벗었다.
껍질처럼 벗겨진 옷들을 꽃 밭 벽돌 위에 뉘었다. 어둠 속에서도 봉숭아가 빗발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고 패랭이가 고개 숙이는 모습이 보였다. 용서해라 오늘 나를 용서하고 연주를 용서하고 해님 언니를 용서해라 우리들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세상엔 너무 많아.
우다닥 거리며 연주가 먼저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해님 언니는 연주 다음으로 뛰어가며 아아악...소리 질러댔다. 뜨거운 물이 내 볼을 타고 내린다. 몸을 일으키며 캄캄하지도 푸르스름하지도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린 가지 닮은 연주가 가여웠고 패랭이 닮은 내가 향그러운 수국 닮은 햇님 언니가 미어질 듯 애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도 언덕을 내리 달렸다.
좀 전까지 캄캄하다고 느껴지던 동네 길이 환하게 보였다. 저만치 달려가는 해님 언니의 몸이 보였다. 야윈 등판 하며 가느다란 팔이 힘차게 움직였다. 이를 앙다물고 달렸다. 대열에 함께 서고 싶었다.
알몸으로 비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은 통쾌했다. 이 비에 새들은 어디로 가서 숨어있을까? 여치는? 다람쥐는? 모두 소리쳐 불러내고 싶었다. 연주는 어느새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어 흔들어 댔다. 언제나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나직나직 이야기하던 연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달맞이꽃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스치기만 해도 살 갓이 베어지던 날카로은 풀들은 휘청하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뭐지?
연주가 소리치자 해님 언니가 소리쳤다.
소나기....
다시 연주가 소리치며 물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뭐지?
그건 어른들이야..
내가 악을 쓰며 대답했다.
하하하... 아니야... 다 틀렸어 그건 말이야 바로 나야... 내가 슬프지 않으면 슬픔이 뭔지도 모르지....
연주의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 오라기 흘러내리지 않게 단정히 묶여있던 그녀의 머리칼은 가슴에 목 언저리에 거미줄처럼 선을 그어 번개가 번쩍하고 빚을 비추자 거미여인처럼 보였다. 아직은 한참 자라나는 연주의 몸에 채찍의 흔적 같이 보였다. 여윈 몸의 해님 언니는 우리보다 가느다란 육신을 하늘 앞에 드러내어 연주의 말처럼 술 찌꺼기를 씻어 내고 있는지 길 한가운데로 걷기만 했다. 천둥이 연달아 우리보다 더 큰 소리로 꽈르릉거렸다.
레인 레인 레인 이란 음악을 들으면 초입 부분에 저 천둥소리가 들려 그리고 멈추지 않고 내리는 빗소리가 들리지... 만토바니.. 폴모리... 그들이 이 밤에 여기 있다 해도 저 빗소리보다 더 멋진 연주는 하지 못할 거야.
언니....
연주가 처음으로 언니라고 나를 불러 세웠다.
이 비를 맞고 감기 걸려서 죽는다 해도 후회 없지? 언니... 젖 참 예쁘다.. 난 말이야.. 이렇게 빨개 벗고 소나기 맞으며 미쳐보는 것이 소원이었어... 죽어도 좋겠어.. 이런 밤이라면 말이야..
죽는다는 것이 뭔지 나는 다 알아..... 죽기도 해 보았으니까..
이미 연주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영혼은 매우 성숙하여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해님 언니는 우리들이 즐기는 방법보다 더 한치 높은 곳에 머무는 듯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양팔을 벌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오늘 밤을 성스럽게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산을 쏘다녔다. 산에 익숙한 연주가 새벽이라고 알려주었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 앞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우리는 제자리로 가야 했다. 뒷마당 펌프를 저어 몸을 씻고 머리를 감으며 서로 마주치는 눈길도 없었으며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다만 공유하고 있는 무형의 그 무엇은 미래에 다가올 어떠한 힘듦도 미리 체험한 오늘을 생각하며 헤쳐나가기를 다짐했다. 아니 특별하게 주고받은 한마디 말은 없었지만 영성체처럼 그리 망울 졌다.
영화 속 육각의 집 창가에 빗줄기가 흘러내리고 나는 열여섯 너는 열일곱의 노래는 우리들의 그 밤과 흡사했다. 상황 설정이 다르고 주어진 시야가 달랐지만 우리의 내면에 흐르던 강물은 같았다. 그것은 영혼 과육 신이 자랐다는 출발점의 흰 선이었고 격정적인 감동의 표현이다. 그 날 이후 정말 오랫동안 연주는 내 곁에 머물며 나를 지켜주었고 나는 연주를 지켜주었었다.
엊그제는 야광 램프가 번득이는 밤바다에서 새벽을 보냈다. 까르륵 웃음 짓는 소리들이 파도와 더불어 내 곁에 밀려와 여럿이 있으면서도 나는 혼자가 되어 아름답고 신비했던 나신의 무곡을 떠올렸다. 아직은 소나기에 몸을 내 맡길 수 있겠지만, 그래서 덜 그리울 줄 생각되나 더 오랜 시간이 지나 비에 내 맡길 육신이 못 될 때가 되면 지금보다 더 사무치게 그 밤이 그리워지게 될 것이다.
포르테 소나기 나신의 무곡을 떠올리며 그때는 내 가슴에 사람이 담겨 있지 않았으나 그리 길지 않은 세월 지난 지금엔 너무 많은 사람들 너무 많은 일들이 나를 채우고 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릴 하늘이다. 수락산 그 밤처럼 비가 내린다 해도 이제 다시는 나신의 무곡을 출 수 없음이 느껴지는 서늘한 마음이 들며 여태까지도 그 날의 마음으로 세상 한가운데서 살고 있을 연주의 이름을 만져본다.
| 새로운 도전의 첫 디딤은 평화로운 이곳에서. (0) | 2024.11.14 |
|---|---|
| 앉아서 소변 보는 남자 (0) | 2020.12.04 |
| 밤에 잘 때 이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0) | 2020.12.04 |
| 포르테 포르테 裸身의 巫曲 2 (0) | 2020.11.28 |
| 포르테 포르테 裸身의 巫曲 (0) | 2020.11.28 |
/* 본문 가운데 정렬 - 모든 요소 */ .area_view .article-view * { text-align: center !important; } .entry-content * { text-align: center !important; } #content p { text-align: center !important; } }